Waiting line

대기시간은 겨우 10분이었지만 줄이 꽤 길어졌다. 사람들의 표정에서 슬슬 짜증의 비율이 지루함의 비율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때, 내 앞에 홀로 서있던 남자를 덥썩 안으며 놀래킨건 또래의 여자친구인 듯했다. 둘이 재회의 기쁨을 나누며 핑크빛 오라를 내뿜는 사이 사람들사이에서는 입밖으로 꺼내지는 않아도 공공연하게 드러나는 미묘한 긴장감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마감시간에 가까운 이 시간에 내 앞에 한 사람이 늘어난다는 것은 내가 서비스를 받을수 있는 가능성이 그만큼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충분히 주위를 핑크빛으로 물들이고나자 여자는 남자의 손을 잡고 줄 맨뒤로 자연스럽게 이동을 했다. 보이지않는 사람들의 압박과 눈치에 밀려서라기 보다는 자발적이고 자연스러운 행동이었기에, 괜한 부정적 오라를 만들어내던 사람들이 머쓱해지는 순간이었다.
부끄럽지만 나도 머쓱해졌던 사람들 중 하나였고, 동시에 뭔가를 배우게 된 순간이었다.

철들었다는 증거, 아직 멀었다는 증거

철들었다는 증거

누군가 틀리게 말해도 굳이 전부 지적질하는 않는다.
하고싶은 말이 있어도 참는다.
지금의 내 감정을 알아달라고 소리없는 아우성을 외쳐대지 않는다.
상대방의 입장을 전보다 더 이해한다.
부조리하지만 내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황에 스스로를 심하게 자책하지 않는다.(여전히 하기는 한다.)

아직 멀었다는 증거

외로움을 즐기지 못한다.
상실감을 견뎌내지 못한다.
사람과의 이별은 여전히 받아들이기 힘들다.

허지웅 – 버티는 삶에 관하여

2년 반 동안 자동차로 출퇴근한다는 핑계로 거의 책을 읽지 않았다. 먼 통근거리는 게으름의 좋은 핑계처였다. 읽지도 않는데 쓸리는 만무했다. 그렇게 책과 담을 쌓다보니 어휘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지난 30년간 쌓아온 언어능력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마치 한번 습득된 국어능력의 유통기한은 6개월이라고 정해져 있듯이, 나는 백치 아다다 마냥 어버버 거리기 일쑤였고, 맞아떨어지는 단어를 찾지 못해 유치원생 마냥 같은 단어만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좋은 기회로 이직을 하고, 출퇴근을 지하철로 하게 되면서 아이패드를 살 좋은 핑계거리가 생겼다.(읭?) 쉽게 질리고 한번에 여러가지 책들을 읽는 나의 희한한 독서습관을 충족시켜줄 아이패드를 호기롭게 (15개월 무이자 할부로) 구매하고, 개나 소나 다 있는 그 아이패드를 난 뿌듯해하며 출근길 지옥철에서 꺼내어 보려 했으나 그 생각이 참 어리석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채 2초가 걸리지 않았다. 결국 난 출근시간까지 앞당기면서까지 아이패드를 산 당위성을 만들어 보였고, 독서라는 좋은 습관을 (실로 어렵게) 만들어냈다.

처음에는 우선 뒤떨어진 시장의 트랜드를 살펴보기 위해 경영, 마케팅 서적들을 구매해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조금씩 욕심났던 책을 한 두권 사게되었고 결국 허지웅님의 ‘버티는 삶에 대하여’를 구매하기에 이르렀던 것이었다.(두둥!)

에세이의 장점이자 단점은 마치 글쓴이가 내 귀에 대고 읽어주는것 같은 생생함으로 자칫 상상력이 다소 무뎌질 수 있다는 점에 있다. 하지만 그런 단점이든 장점이든간에 이 책은 2년 반의 무독(無讀)의 공백을 깨주기에 더할나위없는 책이었다.

우선 허지웅의 어투는 한때 나를 둘러싸던 오오라와 같았던 냉소적이고 염세적인 말투이기 때문에 내게는 꽤나 친근한 데다가, 지금도 내가 챈들러를 최고의 드라마 캐릭터로 꼽는 이유인, 비뚤어꼬집는 개그를 허지웅은 너무 사랑스럽게(?) 풀어냈기 때문에, 지하철에서 하차하기 위해 패드를 덮는 행위가 나 스스로에게 미안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1/3정도 읽은 지금, 마음만 먹으면 단숨에 읽어내려갈 수 있겠지만, 마치 제일 맛있는 청포도맛 사탕을 한번에 다 먹지 않고 조금씩 조금씩 아껴먹는 것처럼, 조금씩 조금씩 음미하며 퇴근길의 나에게 상을 내려주고 싶다.

긴 공백을 뚫고 다시금 독서와 글쓰기로 돌아오게 해 준 허지웅님께 감사의 의미로 나와 데이트할 영광을…(발그레)

감정

어쩌면 나는 누군가를 진짜 그리워한다기 보다는,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그 마음을 그리워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 사람을 사랑했던, 그 사람에게 사랑받았던 그때의 그 감정을, 그당시의 내 마음의 상태를 그리워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가을방학의 노래가 아침부터 내 감수성의 둑을 무참히 무너뜨렸던가…

2014.09.02

2014.08.15 새벽

그런 순간이 있다.
가수면 상태로 들어가기 직전에 갑자기 시각을 제외한 모든 신경이 급격히 예민해지는 그런 순간 말이다.

눈이 스르륵 감기며 보고 있던 영화의 화면도 동시에 흐릿해지는데 오히려 영화에서 나오는 소리는 솜털이 일동 기립할정도로 크게 들려와 눈이 번쩍 뜨이게 되는 그런 순간.

때론 촉각이 지나치게 예민해져서, 시원하기만 하던 선풍기 바람이 칼날처럼 날라와 잠들려던 내 얼굴을 사납게 갈기는 그런 순간.

마치 모든 감각의 중추기관인 뇌가 하루의 모든 에너지를 소진해버려 다른 감각기관들을 제대로 통솔할수조차 없는 틈을 타서 각각의 감각들이 이때다 싶어 있는 힘껏 신나게 외부의 자극을 흡수하려고 발악이라도 하는것 같다.

오늘 하루 뇌의 명령대로만 움직인게 아쉽고 억울한만큼 더더욱 지들 멋대로 하겠다는 몸부림으로, 예측하지 못하는 온갖 감각들이 민감하게 감지되는 통에, 피곤하지만 잠 들지 못하겠다는 나의 넋두리 이다.

3단논법

1일 1글은 현실적이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잠들기 전, 30분정도 시간내어 그날의 단상 및 느낌, 깨달음 등을 엮으려고 했지만, 막상 컴퓨터를 키면 잡스러운 일에 시간을 낭비하기 일쑤였고, 혹여 약속이라도 있는 날은 당연한 듯 글쓰기는 스킵 되었다.

하루에 A4 반페이지 정도 분량의 생각을 짜내기도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까지가 변명.

 

최소한 노력이라도 했었어야 했다.

스마트폰으로도 가능했기에, 주저리 넋두리라도 늘어놓았어야 했다.

주변에 달라진 것은 없는데 나 혼자 안심하고 안주해 버렸다.

 

—————여기까지가 반성.

 

Quality 보다는 being steady를 더 높은 덕목으로 삼자.

1일 1글은 아니더라도, 1주일 1글은 할 수 있게 노력하자.

보상은 10월에 달콤한 휴가 후 줄줄이 쓰여질 아름다운 글들.

 

—————여기까지가 다짐.

 

한공주와 팔레스타인

 

이 영화는 짐승같은 소년들, 짐승같이 포악하다라기 보다는 짐승같이 원시적인 소년들에게 고깃덩어리처럼 난자당하고 농락당한 소녀가 일상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하는 이야기 이다.

하지만 당연히, 여기서 왜 당연히란 말이 당연히 내 머릿속에서 떠올랐는지 회의가 들지만, 정말 당연히 현실은 너무 어려웠다. 소녀가 피해자인데 왜 피해자가 학교와 거처를 옮겨야하며, 왜 혼자 병원에 가서 의심스런 눈초리를 받으며 고통스런 치료를 받아야 하며, 왜 몸의 상처는 커녕 마음의 상처를 치료해주지도 않고 오히려 벼랑끝으로 몰고가는지, 소녀는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맑은 눈망울로 우리를 바라보며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 눈망울은 실제 어떤 십대 소년의 눈망울이었다. 한 소녀가 아닌 여러 소녀들의 눈을 우리는 지금 이 순간도 외면하고 살아가고 있다.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서 백린탄에 맞아 죽음보다 더 한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민간인들의 사진들이, 검열을 거쳐도 지나치게 끔찍한 모습으로 인터넷 여기저기를 떠돌고 있다. 단연코 사람을 공격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사람이 그 백린탄의 파편에 맞으면 살갖이 타들어가고, 그 고통스런 타들어감은 물로도 꺼지지 않아, 피부에 닿는 순간 살을 도려내야 하는 아주 무시무시한 화학무기이다. 나는 오늘 하루 다이어트를 위해 저녁을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고 있는데, 저 곳에서는 3살짜리 어린아이의 피부를 산채로 도려내고 있다. 그마저도 살리기 위해서 말이다.

 

현실에 눈을 돌리지 말아야 한다는 의무감과 책임감에 어둡고 추악한 현실도 일부러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피하고, 금새 잊고 마는 일들도 일부러 더 오래 기억하고, 끊임없이 자극하곤 했다.  하지만 감수성이 예민하고 남들보다 몇배는 더 강한 공감능력을 가진 나에겐 그런 끔찍한 사건과 현실들은 남들보다 몇배는 더 무겁게 짊어지어야 할 무게로 내 어깨에 내리앉았다.

 

영화나 소설과 같은 픽션보다 때론 차라리 영화였으면 하는 더 잔혹한 현실들을 보게 되고 알게 되면 짧게는 며칠, 몇주 길게는 몇달동안 악몽과 소화불량에 시달린다. 유난히 이런 아픈 현실에 대해 기억력 또한 좋아서 몇달이 지나고 몇년이 지나도 장면장면 생생하게 뇌의 구석구석 남아있다.

 

아마 내가 이런 사회의 비극적인 문제들에 대해 관심이 있는 것은, 단지 이런 ‘내 문제’가 아닌 지극히 ‘남의’ 문제들에 대해 탁상공론을 하며, 나 이 정도로 세상문제에 관심 있소~ 란 코스프레를 하기 위함이고, 정작 나 자신은 그 문제를 해결하는데에 있어서는 모니터 너머로는 한 발짝도 내딛지 않는 비겁한 방관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그래서, 지나치게 성범죄에 관대한 한국사회와, 자본주의에 찌든 비인간적인 권력자들에게서 나는 악취에 비위상해 하면서도 정작 스스로의 악취에는 외면하고 무감각해지고 있다. 내 몸에서 나는 악취가 가장 지독한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글쓰기

 

글쓰기가 어렵다는 사람들이 많다. 나 역시, 6단어로 내기에서 이겨버리는 헤밍웨이같은 천재가 아니기 때문에 글쓰기는 항상 버겁지만, 머릿속에 가득한 생각들을 글로 표현하지 않고 담아두는 것이 더 버겁다.

글쓰기가 힘들다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글쓰기가 아닌 글짓기가 어렵다고 하는 것 같다. 글짓기는 농사를 짓는 것처럼 뮤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것이니 당연히 어렵다. 하지만 글쓰기는 자신이 머릿속에 가지고 있는 생각을 글로 써내려가면 되는 것이니 사실 어려운 것이 아니다. 즉 글쓰기가 어려운 것은 글쓰려는 주제에 대해 본인만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 없기 때문인거다.

글을 잘 쓰려면 많이 읽고 많이 쓰는것만큼 많이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사물과 현상에 대해 관찰하고 사색을 게을리하지 않는 습관이 좋은 글을 쓰는 기초체력이 된다.

생각이 많은 내게 글쓰기는 탈출구이자, 최고의 카타르시스이자, 자기표현의 가장 고급스럽고 자연스러운 방법이다. 글을 쓸 수 있는 지금에 감사한다.

 

inspired by [대통령의 글쓰기]

 

 

어느날 손톱을 보고 든 생각

 

출장 전 바빠서 손톱을 정리할 시간이 없었다. 급한대로 매니큐어가 벗겨진 부분에만 덧바르고 잠이 들었다. 다음날 일어나서 어제 정리한 손톱들을 보니, 굴곡지고, 군데군데 기포가 생기고, 엉망이었다. 오히려 조금 벗겨진 예전이 나았겠다, 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전부 지우고 새로 바를 걸 그랬다.

일이나 관계에서도 그런 경우가 왕왕 발생한다. 시간이 없어서 혹은 지금까지 한게 아까워서 어떻게든 무마해보려고 하다가 이도저도 안되는 경우가 있다. 차라리 그럴때는 미련두지 말고 전부 지우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게 결과적으로는 더 빠른 결론이 도출되기도 한다.

또 다른  관점으로는 강박적인 나의 집착이 있겠다. 조금 벗겨진 매니큐어가 뭐 그리 대수라고, 어차피 남이자세히 봐야만 보이는 것일텐데 나 혼자만 아는 오점 혹은 실수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무리를 해가면서 무마하려고 하는 것이다. 자신만의 완벽주의적인 강박에 사로잡혀서 정작 중요한 일에 신경쓰는 것을 소흘히 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다.